exhibition, Galley O'NewWall, last exhibitions

WÜRDENTRÄGER

균형조정자_메인 포스터
전시작가빈우혁, 하재용/ Bin Woohyuk, Ha Jaeyoung
장르회화, 설치/ Painting, Installation
전시기간2016.7.1 - 2016.7.21
오프닝2016.7.1 금요일 06:00pm
부대행사O’NW Artist’s Talk/ 2016.7.15 금요일 05:00pm
후원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입장료/관람료없음
관람가능시간 및 휴관일11:00 - 19:00 / 일요일, 공휴일 휴관
전시 서문

도망자의 시선에 걸린 풍경
하재용│미술평론

사람들은 저마다 기억 속에 그림 같은 풍경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연 풍경은 복잡한 문명인에게 도피처가 된다. 그래서일까? 다들 산책을 하고, 해돋이를 보기 위해 달려가고, 심지어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내린다. 우리는 ‘풍경화’와 ‘풍경 사진’이라는 가시화한 장소를 소유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 기록된 풍경은 실제 순간을 담아낼 수 없지만 보는 이의 추억을 새긴다. 풍경은 동시에 자연을 타자로, 인간을 주체로 파악하게 돕는 매개체가 되어 왔다. 실제 공간은 눈으로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존재한다. 인간은 풍경을 눈을 통해서 매개할 수밖에 없다. 매개하고 가시화한 풍경은 숭고한 대상처럼 떠받들어지거나 기록되어야 할 이상이 된다. 오늘날에는 풍경마저 관광 상품이 되어 거래된다. 그렇다면 보편적 풍경 말고 개인의 시선을 보여주는 풍경은 없을까? 개인의 풍경은 기억을 매개로 구현될 수 있다. 따라서 오늘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개인의 기억 속 풍경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회화로 이것을 실현하는 빈우혁 작가의 작업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미끄러지는 기억을 이미지화하는 것은 빈우혁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기초적인 전략으로 보인다. 18세기 영국 픽처레스크 취향과 달리 빈우혁 작가의 시선은 풍경을 보편적 대상으로 종결 짓지 않는다. 그에게 풍경은 현실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다. 이 글은 작가와 전시 그리고 작업을 별개로 살펴보면서 빈우혁 작가의 시선이 풍경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보고자 한다.

  1. 트릴로지

빈우혁 작가는 2013년도부터 목탄으로 풍경화를 제작했다. 풍경화 작업은 트릴로지, 즉 삼부작으로 보인다. 삼부작은 이렇게 구분될 수 있다. [1부 – Stirring still 전시 / 2부 – 아르카디아 전시 / 3부 – 이번 전시] 작가의 삼부작은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재료와 소재 그리고 환경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도 시기별로 변하는 작업 요소들을 파악할 필요는 있다. 빈우혁 작가가 2013년도에 그린 풍경화는 이후 작업의 기초가 된다. 이후 시기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사실적 묘사로 그려진 숲은 설산이나 타버린 곳으로 보인다. (실제 설산을 그리기도 했다.) 물에 반사되어 양분된 숲을 그린 작업은 반전된 관계를 보여준다. 목탄 풍경화는 작가가 촬영한 독일 숲 사진을 기초로 그려진다. 원본 사진을 흑백으로 전환해보면 목탄 드로잉과 흡사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목탄이라는 재료는 단순한 이미지 포착이 아니라 기억 속 풍경, 산책하던 순간을 지시한다. 2013년의 풍경화는 2014년에도 이어진다. 2014년도는 과도기로 ‘Stirring still’ 전시에 소개된 작업까지 1부로 공통분모를 이룬다. 처음부터 작가는 목탄으로만 그리지 않았다. 색을 옅게 칠하기도 했는데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정도에 그친다. 아직 1부에 머무르는 2014년도 작업에는 이후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색점’이 나타난다. 색점은 <Grunewald 13, 14, 15>와 같은 작업에서 두드러진다. 빈우혁 작가의 2014년 ‘아르카디아’ 전시에 소개된 작업은 2부로 볼 수 있다. 1부의 작업보다 점점 색이 많아졌는데 <Tiergarten 28>처럼 과슈를 이용해 화면 중앙의 동상을 강조하는 경우 말고는 풍경 자체에 색을 입히지는 않는다. 이미 말했듯이 색점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부의 목탄 풍경화에서 색점은 표면에 얼룩진 듯 부유한다.

1부에서 기초로 완성된 목탄 풍경화를 보는 시선과 덧씌워진 색점을 보는 시선은 공유되지 않는다. 관람자는 원근법에 맞춰져 그려진 풍경 위 색점 때문에 시선을 빼앗긴다. <Tiergarten 26> 작업에서는 색점에 옅은 색칠까지 더해져서 오염된 종이처럼 보일 지경이다.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는 기표덩어리인 색점은 목탄 풍경화를 교란하고 표면을 잠식한다. 아름답거나 숭고한 풍경을 기록하고 기념하는 픽처레스크 방식의 풍경화가 왜 색점에 의해 뭉그러지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목탄 풍경화가 단순히 좋았던 장소를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색점들로 뒤덮여 분산된 시선은 작가가 독일 숲을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옅어져 가는 기억을 보여준다. 사진으로 남겨놓은 독일 풍경을 회화로 다시 그릴수록 도피처로 선택한 독일 숲의 기억 속 이미지는 마모된다. 2부의 시기에서 풍경은 점점 가까워진다. 가깝게 그려진 그림은 크기는 전체 풍경보다 작지만, 형상 붕괴가 두드러진다.

3부작인 이번 전시는 종결점이 아니다. 시기별 특징을 짚어내기 위해 우리는 3부작으로 작업을 분석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가장 최근인 3부는 이전 작업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2부보다 많은 변화를 꾀한다. 표지판처럼 숲에서 현실을 지시하는 다른 기호들이 등장하고, 똑같은 장면을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 작업이 눈에 띈다. 후자에 집중해 보자. 신작 <Bundesdruckerei 48, 49, 50>은 학교 혹은 기관 같은 건물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유화가 목탄 풍경보다 더 두드러졌다. 하늘의 색에 따라서 아침, 오후, 저녁으로 시간이 전개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Bundesdruckerei 48>은 가장 뚜렷하게 풍경이 확인되는 그림이다. <Bundesdruckerei 49>에는 손상된 사진처럼 찢어진 자국이 그려져 있다. <Bundesdruckerei 50>은 완전히 어두워진 풍경 속에 잠식되어 사라진 건물이 마치 그림자처럼 그려진다. 아니 지워진다. 이것은 실제 풍경의 시간이 아니라 기억 속 풍경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알려주는 듯하다. 목탄 풍경화로 그리던 것을 빈우혁 작가는 유화작업으로 정리했다. 반면 <Wüerdenträeger 3>은 이전 작업과 전시에 좀 더 가깝다. 이 작업은 형상을 뭉개지도, 색점을 그려 넣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엇을 그렸는지도 통 알 수 없다. 여기서 ‘무엇’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Wüerdenträeger 3>은 위에서 본 산맥 혹은 돌벽으로 유추된다. 추상화는 아니지만 드러난 이미지가 무엇인지 관람자는 알 수 없다. 왜냐면 우리는 볼 수 없는 작가 개인의 기억 속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1부와 2부 그리고 3부의 작업은 크게 차별점을 가지지 않았다. 우리는 ‘목탄 풍경’을 어떻게 해석할지 좀더 살펴보아야 한다. 재료인 목탄, 소재인 숲, 색점의 교란 같은 작업의 여러 기호를 관통해 나타나는 요란한 화면은 점차 노이즈가 껴가는 작가의 기억을 보여주고 있다.

  1. 도망자의 아르카디아

빈우혁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살펴보아야 할 기호가 있다. 바로 ‘목탄’, ‘숲 풍경’, ‘도망자’다. 이 세 기호를 수식화하면 이렇게 된다. [목탄 + 숲 = 도망자] 작가는 그림이 신산한 가족사와 경제적 어려움에서 도피처의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작가는 한국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진 것 같지 않다. 게다가 빈우혁 작가는 거주지를 해결하고 작업 공간을 찾기 위해 떠돈 지도 오래였다. 작가는 재료를 구매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때 학교 실기실에 버려진 ‘목탄’을 발견하게 된다.

버려진 목탄을 수급한 작가는 2013년 이후의 풍경화에 목탄을 재료로 사용한다. 작가의 작업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독일 숲 풍경도 자율적 선택의 결과는 아니다. 작가는 2013년과 2014년에 총 두 번 독일에 방문했으며 그곳의 숲에 빠졌다. 숲과 작가의 관계는 어린 시절로 이어진다. 빈우혁 작가는 어린 시절 스트레스를 받을 때 산에서 기분 전환을 했다. 어린 시절의 행동은 성인이 된 작가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현실을 잊는 장소로 독일 숲을 선택하게 된다. 산책은 풍경을 찾아 떠나는 모험 혹은 여행과는 다르다. 다만 공통점을 뽑자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빈우혁 작가의 2014년 개인전 제목인 ‘아르카디아’처럼 독일 숲은 작가에게 ‘낙원’이다. 이때 숲은 무조건 이상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숲을 그리는 것은 기억의 편린을 새기는 행위다. 현실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하는 숲은 이미지화될 수 없다. 기억은 점차 마모되어 얼룩진 사진처럼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업 노트에서 숲이 위로가 되기 때문에 그린다고 적는다. 빈우혁 작가에게 작업은 ‘그림을 그리는 시간 동안이라도 비참한 기분을 벗어나려는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숲 자체만큼이나 그 안의 표지판은 빈우혁 작가의 작업에서 특수한 기호다. 작가는 공간 속에서 정해진 길 없이 정처 없이 헤맸다. 따라서 그는 표지판에 기대서 이동해야 했다. 원초적 자연처럼 꾸며진 숲 안에서 자리를 차지해 자신의 외연을 뽐내는 표지판은 현실적 기능만 한다. 따라서 작가에게 도피의 순간은 표지판이라는 사회적 상징 때문에 가능하다. 재현된 표지판은 사회적 관계를 은폐하고 그저 자신의 얼굴만 드러낸다.

재료인 목탄과 소재인 독일 숲 풍경은 작가를 ‘도망자’로 완결 짓는다. 풍경화 그리기는 도피하던 작가가 막다른 골목(한국에 머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서게 될 때 진행된다. 목탄으로 그려진 숲은 ‘도망자’나 ‘도피’의 개념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가의 행동반경은 주변 환경에 따라 억압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힘든 상황을 그리지 않고 도피의 순간을 그렸을까? 그것이 현실을 지탱할 동아줄이 아닐까? 빈우혁 작가는 풍경화를 그려서 동아줄을 잡는다. 도피는 지긋지긋한 현실을 또 이어나가게 해준다. 목탄 풍경화는 단순해 보이지만 소재와 재료의 선택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회에서 내몰린 개인의 시선을 보여준다. 도망자는 현실에서 사라지려 하지만 끊임없이 다시 소환된다. 이 도피와 복귀의 굴레에서 ‘아르카디아’의 이미지는 소모되어간다. 삼부작처럼 진행된 목탄 드로잉의 표면이 붕괴하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빈우혁 작가의 그리기는 상처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행위로 보인다.

  1. 기억(그림) 같은 풍경

글의 서두에서 나는 빈우혁 작가의 풍경화가 보통 풍경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다고 언급했다. 오늘날 풍경과 풍경 이미지(회화, 사진 등)를 마주하는 태도는 18세기 영국의 픽처레스크 취향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산업혁명이 활발했던 18세기 후반 시작되어 1830년까지 형성된 픽처레스크 취향은 고전주의의 미를 자연주의와 결합했다고 평가된다. 우리의 목적인 풍경을 보는 시선을 비교할 때 픽처레스크 투어를 주목해야 한다. 픽처레스크 투어는 그랜드 투어에서 비롯되었다. 귀족들의 그랜드 투어가 영국 대중(여행을 갈 만큼의 여유가 있는 대중)의 픽처레스크 투어로 변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좁힐 수 있다. 첫 번째로 영국인들은 영국 풍경의 아름다움에 주목했다. 두 번째로 그랜드 투어를 통해 자연을 보는 고전주의 시각을 배웠다. 세 번째로 산업혁명으로 도시에 인구가 집중되어 자연을 향한 향수가 발생했다. 또한, 교통 수단과 도로가 제공되어 원활한 이동이 가능해졌다. 국내 여행은 그랜드 투어보다 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픽처레스크 취향은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대상화된 자연과 그 자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관조하는 태도로 보인다. 자연을 정복한다는 근대의 가치관은 산업화한 도시를 형성했다. 그러나 도시는 금세 지루한 대상이 되었다. 도시에 사는 영국인들은 자연의 경관을 보기를 바랐다. 자연 풍경을 보기 위해 그들은 적극적으로 여행에 나서게 되었다. 18세기의 풍경을 바라보는 태도는 우리에게도 남아있다. 그러나 현재는 일상과 연관 없는 도시의 마천루와 야경, 거리 등 실제 장소와 무관한 장소가 시각적 풍경으로 취급된다. 따라서 픽처레스크는 인간의 시각화가 대규모로 발생해 거대한 보편적 취향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을 예시한다.픽처레스크 취향이 좇았던 대상은 실제 작품으로 그려지기도 했지만 그 대상인 풍경이 ‘작품이 될 법한 풍경’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클로드 로랭이 고안하고 윌리엄 길핀이 보급한 ‘클로드 유리'(이 유리는 코팅된 흑색 볼록 거울이다)를 통해 마치 거장의 그림을 보듯 실제 풍경을 바라보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이 점이 더 심해져 풍경은 사진으로 언제든지 낚을 수 있게 되었다. 픽처레스크 풍경화나 정원 그리고 오늘의 풍경 사진은 실제 장소와 무관하게 인간이 바라는 방향으로 구체화한 이미지일 뿐이다. 픽처레스크 풍경화는 단순히 자연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자연을 시각화하고 대상화해서 끊임없이 정복하려는 태도로 보인다. 이렇게 구체화한 자연은 본래의 모습보다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구성된 기계적 자연이다. 빈우혁 작가가 풍경화로 그려내는 독일 숲 또한 구성은 원초적 자연과는 다르다.

또한 그의 시선은 픽처레스크 풍경이나 오늘날 관광 풍경의 시선과도 다르다. 보편적 취향을 위해 형성된 독일 숲의 사진 이미지는 빈우혁 작가 개인의 기억과 교차하면서 회화로 옮겨진다. 그 결과값으로 풍경은 기억과 같은 풍경이 된다. 픽처레스크 취향이 풍경을 소유하고 곁에 두려 하는 반면 빈우혁 작가의 그림은 풍경을 그리면서 풍경에 무관심하다. 픽처레스크 풍경은 과거에 개인 소유의 풍경 정원을 만들었고, 현재에는 아파트 내 공원이나 미군 주둔지 철거 후에 지어지는 국립공원처럼 여가를 누리기 위한 곳으로 만들어진다. 오히려 오늘날 픽처레스크 취향은 더 보편적으로 변모했고, 따라서 풍경은 특별한 대상이기를 멈췄다. 빈우혁 작가의 풍경화는 산책이라는 반복 행위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관람자에게 그 풍경은 한 개인의 시선이다. 그 시선에는 여러 가지 단서들이 나열되어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그 단서들을 점검했다.

빈우혁 작가의 목탄 풍경화는 비슷한 장소를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작품 제목으로 장소가 어딘지 알 수 있지만, 여전히 이미지는 모호하다. 풍경은 실제 장소에 작가의 기억이 뒤덮여 모호해진다. 풍경 사진과 영상은 추억의 시간만큼 시간성을 가진다. 그러나 빈우혁 작가의 목탄 풍경화에는 시간성이 소거된다. 시간성의 제거는 이미지 안에서 뚜렷한 사건을 발견할 수 없게 한다. 게다가 장소의 구체적 단서마저 사라진다. 따라서 독일 숲 풍경은 실제로 인지되는 물리적 공간에서 빗겨나간다. 빈우혁 작가는 기록된 사진 영상을 기초로 자신의 기억 속 숲의 이미지를 프로타주한다. 작업의 기초인 산책 행위와 사진은 회화로 복제된다. 사진을 기초로 하는 회화는 오늘날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시각정보로서 각자의 눈보다 더 확실히 기억을 기록하는 사진은 숲에서 멀어진 순간 그곳을 떠올리는 매개체가 된다. 매개작용은 더 나아가 회화를 그리는 제작 순간의 고민을 작가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그리는 행위는 ‘작가 자신’에서 출발하며 이미지와 고민은 외부에서 의존한다. 빈우혁 작가의 작업은 불탄 뒤 재가 남은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천천히 연소한 것이 아니라 급속히 탄 것 같다. 실제로 장소가 불탄 게 아니라 작가의 기억 속 풍경- 이미지가 연소한 모습이다. 기억이 점차 마모되는 방식을 우리는 A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불타버린 이미지, 드러나는 색점, 붕괴하는 형상은 모두 작가 개인의 기억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여준다. 빈우혁 작가는 현실과 축을 달리해 좋은 기억에 매달린다. 그러나 좋은 기억은 지나갔다. 그 풍경은 상실되었다. 산책이라는 행위를 대체하고 상실감을 메우기 위해서 숲은 캔버스에 그려졌다.

전시전경

작품 이미지

Beltir 47

빈우혁, Beltir 47, 캔버스에 유채, 65 x 90 cm, 2015
Bin, Woohyuk, Beltir 47, oil on canvas, 65 x 90 cm, 2015

Sanssouci 42

빈우혁, Sanssouci 42, 캔버스에 목탄, 아크릴, 45 x 45 cm, 2015
Bin, Woohyuk, Sanssouci 42, charcoal and acrylic on canvas, 45 x 45 cm, 2015

Fischtalpark 43

빈우혁, Fischtalpark 43, 캔버스에 목탄, 유채, 90 x 116 cm, 2015
Bin, Woohyuk, Fischtalpark 43, charcoal and oil on canvas, 90 x 116 cm, 2015

Bundesdruckerei 48

빈우혁, Bundesdruckerei 48, 캔버스에 목탄, 유채, 130 x 162 cm, 2016
Bin, Woohyuk, Bundesdruckerei 48, charcoal and oil on canvas, 130 x 162 cm, 2016

Bundesdruckerei 49

빈우혁, Bundesdruckerei 49, 캔버스에 목탄, 유채, 130 x 162 cm, 2016
Bin, Woohyuk, Bundesdruckerei 49, charcoal and oil on canvas, 130 x 162 cm, 2016

Bundesdruckerei 50

빈우혁, Bundesdruckerei 50, 캔버스에 목탄, 유채, 130 x 162 cm, 2016
Bin, Woohyuk, Bundesdruckerei 50, charcoal and oil on canvas, 130 x 162 cm, 2016